[단편] 도서관의 바보들

in zzan •  6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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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바보들

남자는 오늘도 졸고 있다. 왼쪽으로 살짝 기운 고개 아래 깍지 낀 손을 올려놓은 볼록한 배가 고르게 오르내린다. 보고 싶지 않아도 절로 눈에 들어온다. 유리 출입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오면 바로 첫째 줄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꼭 출입문 쪽을 향해. 지난해까지는 내키는 대로 앉았던 거 같은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올해는 출입문 앞을 고수하고 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오전 11시 30분을 가리킨다. 여자가 성인열람실 문을 밀고 들어오는 시간이다. 회색에 가까운 단발머리가 망설임 없이 가운데 통로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간다. 여자의 표정이 살짝 찌프러지는 것 같더니 이내 돌아선다. 그녀가 앉으려는 좌석에 누군가가 앉은 모양이다. 나름의 질서를 흩뜨리는 이들은 어쩌다 들른 이용자다. 이들은 도서관 회원증이 없거나 기계에서 좌석표를 뽑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좌석 번호표를 뽑아야 한다고 누군가 소근거려 알려주면 처음 보는 기계의 화면을 노려보며 이거저거 누르다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도서관 문을 나가 버린다. 시민 공공재가 언제부터 이리 문턱이 높아졌어?
아무튼 여자는 기계에서 좌석표를 다시 출력해 왔는데 평소 앉던 자리에서 한 줄 옮겼을 뿐인데도 남자의 푸짐한 뒷모습이 빤히 보였다. 남자는 아직도 자고 있다. 평일임을 감안하더라도 제1열람실의 백여 석에 고작 열댓 명의 머리가 보인다. 이 도서관이 북적거리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은 다들 어디서 벌어먹고 살고 있는지.
일제 강점기에 맨몸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타고난 뚝심과 총명함으로 자본을 모은 회장이 지역의 큰 공사를 따냈고, 군민을 위해 도서관을 건립하여 기증했다는 내용이 건물 입구 오석(烏石)에 새겨 있다. 그가 거의 거저로 얻은 땅을 정비해 되판 일이나 당시 움막에서 생활했던 노동자의 처우에 대해서 사람들은 몰랐다. 영웅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그저 사람들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이 대리석 건물을 자랑스러워했다. 도서관 현관에 서면 오밀조밀한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였고, 너른 논밭을 지나 저 멀리 상왕산 자락이 연한 수묵화처럼 흘러 자못 호연지기가 생겼으니까. 이런 디서 공부허믄 장차 큰 인물이 나오지 않겄어? 충청도 핫바지 속이 월매나 실헌지 붸 줘야 혀.
1990년대만 해도 사람들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고, 실지로 읽었다. 그래서 군 전체에 하나뿐인 도서관은 늘 이용자들로 붐볐고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은 장시간 진을 쳤다. 특히 중간, 기말고사 기간의 주말에는 자리 잡기 경쟁이 일어났다. 잠이 덜 깬 얼굴로 개관하기 전에 줄을 서 의리로 친구 자리까지 맡아 주었다. 당연히 예쁜 여학생, 잘생긴 남학생을 향한 시선이 날아다녔고 지하 매점은 라면과 빙과류가 잘 팔렸다. 도서관 간답시고 가방 메고 올라와 공원 농구대에서 딱 한 시간만 몸 푼다는 게 한나절이 되기도 했다. 자리를 못 잡은 학생들의 눈총을 하루종일 받은 문제집이 저녁때 주인의 손에 의해 슬그머니 거두어졌다. 앞자리 친구에게 지우개를 던지고 숨어서 키득거리는 녀석을 엄한 눈초리로 훈계하는 아저씨, 그런가 하면 도서관 뒤쪽의 검은 숲에서 서로를 더듬는 뜨거운 숨결도 없진 않았으리라.
군이 시로 승격되는 사이에 개인 컴퓨터 세상이 되었고 그게 휴대폰으로 이어지는 변화 속에 도서관은 저절로 정숙해졌다. 학생들은 어지간해서 산 중턱에 있는 이 오래된 건물까지 올라오지 않았는데 시내에 교육청 관할 최신식 도서관이 지어진 것도 한 이유였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보다는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필요한 지식은 인터넷에 다 있다는데 책 한 권을 언제 다 읽어? 사람들은 책 읽는 법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도서관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개가 취업이나 승진을 준비하는 사람이고 더러 한자가 많이 섞인 책자를 열정적으로 필사하는 머리 허연 노인도 있다. 그리고 최근에야 이 여자의 존재를 눈치 챈 젊은 남자와 벌써 몇 년째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보아온 이 여자가 있다. 둘은 오랜 시간 도서관을 지켜 온 사람들이다.
여자는 들고 있던 천 가방을 칸막이 자리에 올려놓고 화장실로 향했다. 벽에 부착된 물비누를 두 번 눌러 손을 씻고 종이 수건 두 장을 뽑아 문지른 다음 버리지 않고 들고 나온다. 자리로 돌아온 여자는 들고 온 것으로 칸막이 안쪽을 문질렀다. 도서관에서 대출한 것으로 보이는 책 두 권과 공책 하나를 꺼내 놓으니 칸막이 안이 꽉 찬다. 상당히 답답한 구조인데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초창기부터 이 책상이었던 거 같다. 여자는 책갈피를 꽂아 둔 부분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어깨가 단정하다. 그때까지도 남자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평일 오전의 도서관은 가난한 자들이 흘린 영혼 같은 먼지를 빨아내는 환풍기 소리 외엔 고요했다.

단잠에서 눈을 뜬 남자는 소리 안 나게 기지개를 켜며 휴대폰 충전대로 향했다. 도서관 측은 몇 가지 편의를 제공했는데 그중 하나가 공중전화기를 떼어 버린 자리에 도발적인 빨간색의 부스를 설치하여 개인 통화를 그곳으로 유도한 일이다. 그 덕에 늙은이들의 통화 소음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남자가 질색하는 꼰대들의 무신경함이다. 또 하나가 충전기 거치대를 마련해 줘서 개인이 충전기를 들고 콘센트를 찾아 돌아다니는 번거로움을 해결해 준 것이다. 덕분에 온라인 수강을 하다가 휴대폰이 방전되어 낭패 보는 일이 없게 되었다.
남자가 충전대를 들여다보니 네 개의 가지 중에서 세 개가 충전 중이고 놀고 있는 하나는 애플사용이라 소용없다. 그 중 가까운 갈색 케이스를 열어 휴대폰의 화면을 슬쩍 건드리니 백 프로 충전이라고 뜬다. 그것을 빼서 옆으로 밀고 자신의 것을 끼웠다. 자리로 돌아온 그는 정면의 미색 벽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동그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30분 정도 책 좀 더 보다가 오늘은 날씨도 화창한데 중국성 짜장면이 좋겠다고 결정하고 입맛을 다셨다. 가운데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더 많이 넘겨진 행정법 총론이 그의 칸막이 안에 묵직히 들어앉아 있다. 책배는 손때를 탔고 겉장이 살짝 말렸다.
남자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가 출입문을 밀면서 내부를 일별했다. 출입구에서 가장 먼 안쪽 자리를 지정석처럼 차지한 남자는 탁상 달력 세 개로 칸막이 위쪽을 막아 머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 남자와 비껴 앉은 여자의 뒷모습,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오른쪽 벽 밑에 짱박은 있는 재수생 두엇, 그리고 왼편 창측 중간에 몇몇 사람의 상체가 보인다. 나이 먹은 남자들은 무심코 끄응 하는 신음 소리를 흘렸다. 말이 별로 없는 그의 아버지도 가끔 그러는데,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리를 들으면 뱃심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 외에 어쩌다 오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보이고, 저 할머니가 오늘은 앞쪽 자리네, 갈수록 흰머리가 느는듯한 정수리를 보며 남자는 생각했다.
사람 성향에 따라 선호하는 좌석도 다르다는 것이 남자의 생각이다. 이용자의 왕래가 적은 안쪽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처럼 출입구 근처를 고수하는 사람도 있다. 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남향 창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벽 밑의 바람 타지 않는 자리를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제1열람실인 성인열람실을 좋아하는 청소년도 있고, 꼭 제2열람실인 청소년열람실 한 칸을 고수하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도 있다. 저 할머니는 창가를 지키더니 언제부턴가 가운데 통로 쪽으로 옮겼다. 11월 바람에 파르르 떠는 마른 잎을 연상시키는, 아줌마라고 하기엔 늙었고 할머니라고 하기엔 좀 억울한 여자. 여자의 이십 대를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다. 이 도서관처럼 조금씩 낡아가는 것인가. 보통은 책을 읽었고 때로는 뭔가를 쓰는 것 같았다.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뭐하러 이 칙칙한 도서관에 눌러붙어 있는지, 참 특이한 유형이다. 아무튼 이용자들은 다 목적이 있어 도서관에 온다.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쳐 그것들과 나름의 사투를 벌이다가 목적을 이뤘거나 혹은 장렬히 포기한 다음에는 이 열람실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한동안 그 여자 덕에 이 빌어먹을 열람실이 좋아질 뻔한 적도 있었다. 까만 생머리를 목덜미 뒤로 동여맨, 분홍 삼선 슬리퍼 안의 맨발이 앙증맞던 그녀. 혹시나 했는데 책상 위에 같은 출판사의 행정학총론이 펼쳐진 걸 보고는 혼자 괜히 반가웠다. 푸들 키우는 개엄마가 다른 집 푸들 보고 반기듯이. 가운데 통로로 여러 사람이 지나다녀도 몰랐는데 희한하게 고개를 들면 그녀가 출입문을 향하던지, 밀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고 싶었지만 부끄러웠다. 아니, 딱 한번 휴게실에 비치된 개인 사물함에서 칫솔을 꺼내다가 근처 사물함을 쓰고 있는 그녀와 나란히 섰을 때 말을 붙여 보긴 했다.
“에듀윌 꺼 들으세요? 해커스보다 낫나?”
자연스러웠다.
“아, 에듀윌요. 해커스는 안 들어 봤어요.”
여자도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마주칠 때마다 그녀의 눈길을 잡으려 했으나 그녀는 그를 의식하지 못했다. 마음이 시렸다. 얼마 뒤 공무원 시험이 있었고, 여자는 보이지 않았고 남자는 남았다.
낙방한 그를 위해 친구들이 술을 사겠다고 했다. 그나마 일이 바쁘다, 선약이 있다 등의 이유로 참석인원이 허술해진 고교 친구 서너 명과 시내 곱창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너 벌써 몇 번째냐 집어치워라, 아니 아까우니 한 번만 더 하고 그만해라. 그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꽤 들이켰다. 지금이 몇 시지? 도서관 가야 하는데. 두통과 구역질에 눈을 뜬 그는 두꺼운 커튼으로 세상을 차단한 침대 위에 누운 자신을 봤다.
방향제와 곰팡내의 합작으로 머리를 더 아프게 하는 이곳은 터미널 뒤편 저렴한 모텔이며 옆에 모로 누워 곤히 자는 벗은 어깨는 간밤 일탈의 증거다. 황급히 모텔을 나선 그는 약국으로 달려가 숙취 해소제와 항생제를 샀다.
그때가 벌써 3년 전이니 이 지긋지긋한 전쟁에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거기에 먹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그의 몸은 급격히 불었다. 자존감 같은 것은 도서관 지하 매점 주인 남자의 듬성듬성한 턱수염만큼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공장으로 돌아가기는 싫다는 게 그의 오기다.
이명박 정부가 띄워놓은 특성화고교 정책은 그의 인생을 이상하게 꼬아 놓았다. 대학에 안 가고도 대기업의 정직원이 되는 방법이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다. 당시 중학생이던 그는 시에서 제일 학급수가 많은 중학교의 한 반에서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대다수의 국민들처럼 그의 엄마도 방송과 정부를 믿었다. 남자는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제철고등학교의 과 수석을 차지했고, 학교장과 장학사로부터 축하 전화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못했다. 카메라 그림자만 보여도 몸이 굳었고 달달 외운 대사건만 그물에 걸린 서해안 박하지처럼 엉켜 입 밖으로 나가질 못했다. 그보다 성적도 낮고 생긴 것도 소도둑놈 같은 녀석이 특채되었다. 세상은 초랭이 방정을 선호했다.
그도 졸업과 동시에 다른 철강 회사에 특채가 되긴 했다. 그러나 공장은 너무 크고 시끄러웠으며 무엇보다 마음을 붙일 곳이 없었다. 나이 먹은 남자들은 그를 어린애 취급했고 젊은 선배들은 학교서 뭐 배우고 왔느냐고 깠다. 머리를 울리는 기계 소음을 뚫고 걸쭉한 욕이 추임새처럼 날아왔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현장 특성과 옥석을 빨리 가리는 게 회사 입장에서도 합리적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어쩐지 미운 의붓아들 취급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군대도 안 가고 돈 버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뜻인가. 그는 반년을 버티다가 군대에 지원해 버렸다. 대체복무 하면서 3년간 받을 수 있는 월급이 좀 아깝긴 했지만 큰 미련은 없었다.
제대해서는 잠깐 지역 농공단지에서 용돈벌이를 했다. 3교대가 참 못할 노릇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중에 이런 하청업체에서 재해로 사망하면 개죽음이 아니라 개죽음만도 못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같은 라인의 윤씨 아저씨가 중환자실로 실려 갔는데 사측은 직원의 상태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비용을 덜 들이는 데에만 골몰했다. 기르던 개가 다쳐도 이렇진 않을 텐데. 전율 끝에 그는 그만두겠다는 메시지를 팀장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기왕 그만둘 거 사장한테 한번 엉기기나 해 볼 걸, 나중에 든 생각이었다. 직원들은 죽든지 말든지 너만 잘 처먹고 잘 살면 되냐, 이 씨발눔아.
이것이 그가 고교 졸업 4년 만에 9급 행정직에 도전한 배경이다. 문제는 중학교 이후로 손 놓은 공부라 쉽지 않다는 것이다. 포기하기엔 그간 들인 교재비와 온라인 수강료가 아까웠고 무엇보다 영어와 행정법에서 두어 개씩만 더 맞히면 될 것 같은 점수가 그를 4년째 도서관 귀신으로 만들었다.
성인열람실에는 이렇게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버티고 있는 사람이 몇 더 있다는 게 남자의 짐작이다. 승진 시험 준비자, 자격증 취득파, 방학에 귀가하여 잠깐 들른 대학생을 걸러내면 대충 파악이 된다. 그중 취업파는 아니지만 가장 오래 봐 온 사람이 저 할머니다. 기름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마른 얼굴과 안경 뒤의 날카로운 눈매가 입을 열면 화살 같은 잔소리가 쏟아질 것 같은 비호감이다. 그렇긴 해도 계단을 헉헉대며 올라와 자격증 관련 서적을 책상 위에 부려 놓고 그 위에 엎드려 일단 한잠 자고 시작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이 도서관에서 대출한 다양한 책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나이에 책을 저리 많이 읽어서 뭐에 쓸까. 더러는 도서관 화단 끝 산으로 올라가는 곳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기도 했다. 벤치 위쪽은 풍상에 몸이 휜 적송들이 서로 이마를 맞대고 있다. 여자는 시선을 저 멀리 상왕산 능선에 던져두고 있었다. 간혹 멀티실에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는데 지난 초겨울쯤이었나, 온라인 강의를 들으려던 차였는데 멀티실 등받이 높은 의자 사이에서도 눈에 익은 회색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여자가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는 놀라웠다. 공책을 골똘히 들여 보다가 호박잎에 소나기 쏟아지듯 자판을 두드렸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남자가 도서관에서 제일 가깝다고 찜해 두고 자주 들락거리는 햇님분식에서 제육덮밥을 싹싹 긁어먹고 컴컴한 길을 올라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이파리를 모두 털어내고 시커먼 자태로 겨울잠을 자는 수령 오십 년의 벚나무 길을 지나 돌계단을 천천히 밟았다. 돌계단 위가 주차장인데 추운 겨울 저녁이라 차는 몇 대 없고 산골짜기를 훑어 내려온 냉기가 칼칼했다. 거기서 다시 도서관 현관으로 오르는 대리석 계단이 양쪽에 있다. 습관대로 왼쪽 계단을 오르며 약간 가빠지는 숨에 얼른 살을 빼야지 하는데 밤이라 더 어두운 등나무 아래에서 작고 빨간 불빛이 반짝한다. 누가 흡연실 놔두고 저기서 저러고 있나. 한번 더 쳐다보니 어쩐지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호흡의 불빛에서 안경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앉은자리에 풀도 안 나게 생긴 노인네가 흡연자이라니 완전 반전이다. 저 할마시도 인생 참 피곤하게 사네 그랴.

남자가 슬핏 웃음을 지었다. 부성면 고산리의 타짜인 친할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팡이를 경로당 현관에 기대어 놓고 검정 털신을 벗으면 해가 노릇노릇 서산으로 이울기 전에는 함부로 자리를 뜨지 않는다. 시부모 봉양에 자식 다섯 길러내느라 무릎이 절단났다는 사연은 그가 알 바 아니고 그럼에도 맺힌 게 없는 시원시원한 성품이 좋았다. 하루 재미지게 놀면 그게 장땡인 거여.
그런가 하면 시내에 사는 외할머니는 찬송가와 교회 주보가 들어 있는 손가방이 부적이다. 주하나님을 멀리해서 애가 자꾸 시험에 떨어지는 거라고 충고했다가 엄마가 두어 달간 친정 발길을 끊은 적도 있다.
남자의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점집을 좋아한다. 명리학에 밝다는 도사인지 선생인지가 올해가 남자의 십년 대운이 바뀌는 해이므로 기회라고 했단다. 사주팔자에 관운이 약했는데 대운에 그게 들어 있다나.
그러면 이 짓을 십 년간 더 해야 한다는 뜻이냐고 볼멘소리를 했다가 욕을 푸지게 들었다. 저렇게 말귀가 어두우니 자꾸 떨어지는 거 아니냐고. 말귀 좀 밝게 낳지 그랬느냐고 대들긴 했지만 그는 노란 바탕에 붉은, 글자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요상한 것을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녔다. 이 감옥을 탈출할 수만 있다면 벼 한 가마닌들 못 짊어지고 다니랴. 언젠가는 동사무소, 아니 주민행정복지센터에 한 자리 따악 차지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제일 먼저 헬스장에 등록해서 이 뱃살을 쫘악 빼고 탄탄한 근육을 만들 것이다. 남자는 바지춤을 추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그 여자가 거치대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모른 척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는 그녀 곁을 지나 출입문을 밀었다. 여자의 손에 아까 그가 충전기를 뺐던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저 오랑우탄 같은 녀석이.......’
여자는 자신의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어련히 알아서 뺄까, 고새를 못 참은 건 딱 봐도 방금 나간 저 녀석 짓이다.
오랑우탄이라고 욕하고 보니 그 비유가 적절해서 여자는 슬며시 웃었다. 그녀가 열람실 문을 밀고 들어올 때마다 자고 있는 젊은 남자다. 순한 인상인데 아래턱이 살짝 나온데다 쌍꺼풀이 진해서 새끼 오랑우탄을 연상시켰다. 호르몬 과다로 보이는 털이 구렛나루에서 내려와 턱 전체를 덮었는데 최근에는 살이 많이 붙었다. 그가 고르게 숨을 내쉬며 자는 모습을 보면 무방비 상태가 저런 것이구나 싶다. 잘 보이고픈 이성도, 신경 써야 할 사람도 없는 상태. 햇볕이 만지지 않은 하얀 두 뺨은 복숭아 빛 홍조를 띄기까지 했다.
여자가 보기에 그는 몇 년 동안 9급공무원 수험서만 끼고 있었는데, 저래서 과연 합격할까 안타까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마음 먹으면 문제집을 통째로 외울만한 세월인데 틈만 나면 졸고 있다. 그까짓 공무원이 뭐라고 저리 목을 매나. 사대육신 멀쩡하니 제 한 몸 부려서 먹고 살 만큼 벌고 나머지 시간은 하고 싶은 거 하면 그것이 잘 사는 인생인데 저리 끙끙대고 있다.
국민 세금으로 월급 받으면서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느냐고 꼭 제 주머니에서 내준 것처럼 행패를 부리는 꼴같잖은 인간들에게, 선생님 진정하시고 어쩌고 했던 세월이 35년이었다. 태풍이 올라오면, 징글맞게도 태풍은 한 해도 거른 적이 없는데, 애가 아프든 말든 집안에 초상이 났어도 비상근무에 돌입했다. 우비를 떨쳐입고 역류하는 하수도 구멍을 지켜봐야 안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수렁을 헤치고 촌가를 헤매다 엎어져 똥물에 처박혀 봐야 알게 될 것이다, 아, 이게 말단 공무원의 영광이로구나. 승진이고 뭐고 최소한만 하자고 했음에도 긴 세월 소모적인 일만 하다 보니 남은 것은 빈껍데기다. 여자는 잠깐 조는 시간도 아까웠다. 이런 사정을 그 누구에게도 소리 내어 말한 적은 없으나 마음이 바빴다. 그건 그렇고 녀석은 무엇보다 공부하는 자세가 글러 먹었다. 아침에 와서 한숨 자고 점심 먹고 와서 또 자고 저녁 먹고는 당연히 잘 테고, 그래서 어떻게 그 경쟁률을 뚫는다는 말인가. 여자는 자리로 돌아와 읽고 있던 책의 책갈피를 열었다. 책 밑에 놓인 공책에는 책에서 옮겨 놓은 듯한 글귀가 달필로 쓰여 있었다.
‘자립에 경제적 어려움은 생각보다 큰 타격이었다. 그 신산스러움을 견디게 해 준 것이 글쓰기다. 글만 쓸 수 있다면 나는 외로움도 삶의 고단함도 잊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그린 인물들과 사랑에 빠졌다.’
저자의 약력에서 자신보다 2년 어린 나이를 계산하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시선이 가방 안 흰 종이 뭉치에 가 닿았다. 왼쪽 팔꿈치가 의자 팔걸이에 힘없이 놓이고 오른쪽 주먹이 그녀의 턱을 받쳤다. 그때였다.
“저기,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진짜 열 받는데요, 제가 혼잣말하는 게 어떻다고 태클을 겁니까? 제가 말을 해서 손해 보거나 방해받으신 거 있어요? 네에?
그럼 제게 직접 말하세요. 왜 시빕니까?”
사람들의 머리가 일시에 올라왔다. 늙은 남자가 오랑우탄 닮은 남자 근처 칸막이의 난간에 손을 올리고 열람실 안을 훑어보며 자못 흥분한 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이내 머리들이 칸막이 아래로 사라졌다. 누구 하나 대꾸하지 않자 남자는 중얼거리며 출입문을 거칠게 밀고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그가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정신이 조금 이상하거나 망상증이 있다고 생각했다. 송곳니가 빠진 듯 새는 발음이지만 잘 들어보면 멀티실의 컴퓨터 사용을 개인당 2시간으로 제한시켜 게임만 하는 이용자들을 막은 것도 자기고, 좌석표 제도를 만들도록 요구한 사람도 자기라는 것이다. 최근 열람실 출입문에 떡하니 붙은 ‘흡연 냄새 및 소근거림 금지’라고 붙여 놓은 것의 소근거림이 자기를 겨냥한 것이라 화가 난 모양이다. 정확한 내막이야 직원들이 알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직원들에게는 전설적인 기피 민원인이라는 점이다. 전 건물을 오르내리며 사무실로 찾아와 뭔가를 요구하는, 도서관 아니면 갈 데 없는 사람. 여자가 연민스런 표정으로 남자가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았다.

서점의 로고가 크게 박힌 숫자만 있는 달력이 도서관 벽에 새로이 걸리고도 세 주가 지난 설 연휴 시작 전날이었다. 세뱃돈으로 5만원은 부담스럽고 3만원 권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인터뷰한 내용이 뉴스에 나올 정도로 경기가 나빴다. 그래도 명절은 이상하게 사람을 자극하는 면이 있어서 사람들이 일찌감치 보따리를 써서 도서관을 나갔고, 학생열람실은 물론 성인열람실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창가 쪽으로 검은 머리가 하나 보이고 출입문 근처에 늙은 남자도 가방을 꾸리는 중이다.
책을 덮는 여자의 눈에 아직도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여자가 칸막이 한쪽에 밀어 놨던 휴지를 집어 들고 출입구 근처에 파란 몸 하얀 뚜껑의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그 곁 거치대에 충전중인 휴대폰은 한 대도 없다.
무심코 돌아서는 그녀의 시선이 젊은 남자의 시선과 부딪쳤다. 남자는 멍한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보다가 여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바로 고개를 들어 다시 여자를 쳐다보았는데 그 시선에 안스러움 같은 애매한 것이 담겨 있었다. 여자도 입주변의 뻣뻣한 근육을 움직여 표정을 지어 보였다. 3초도 안됐지만 서로를 인식하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목도리를 두르고 가방을 어깨에 멘 여자의 모습이 출입문 밖 저쪽으로 사라지자 남자도 손에 쥐고 있던 샤프펜슬을 책 사이에 끼워 탁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시계가 8시를 가리켰고 유리창 밖은 캄캄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공무원 시험이 있었고 젊은 남자는 도서관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고정 자리는 누군가 앉기도 했지만 대개는 비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여자도 보이지 않았다. 봉춘산 해송들은 오늘도 서해안 바닷바람을 맞아 몸을 해초처럼 흔들며 도서관에 혼을 맡기러 올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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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에서 본 가장 긴 글이네요!

읽지는 마시고….. ㅋㅋ

중간, 기말고사 기간의 주말에는 자리 잡기 경쟁이 일어났다.

예전에 이쁜 여학생 자리 잡아 준다고 친구 자취방에 잠 자고 일찍 도서관 가고 그랬는데...ㅋㅋ

다 읽었어요.

혹시 도잠님 작품? ^^

카페에 손님 없어요?
이 재미없는 걸 다 읽고 계시게요. ㅋㅋ

덕분에 단편 하나 봤습니다. ㅋㅋ

냉철하게 비편을 해주셔얍쥬…

직접 쓰신건가요..길어서리 흐흐

읽지 마세염. 쓸데없는 글임다….

제 5 회 스팀잇 포스팅 큐레이션 이벤트 참여자 글 - 2025-06-25
https://www.steemit.com/@talkit/-5----------202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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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작품 활동 부지런히 하시기 바랍니다.
더 늦기전에 볼수있어 다행이구요.